고려대학교 사범대학

QUICK MENU
  • 로그인
  • 사이트맵

동궐도

동궐도 東闕圖

 

비단에 채색

전체 273.0 x 584.0cm

각 첩 45.7 x 36.3cm(16첩)

조선 1828~1830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국보 제249호

 

Ⅰ. 동궐을 그리다

<그림 1.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동궐도>

 

   동궐도는 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궁궐 그림이다. 그림 왼쪽에 창덕궁이 오른쪽에 창경궁이 배치되어 있고, 윗부분에는 후원이 그려져 있다. 궁궐 건축과 이를 둘러싼 자연의 모습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평행사선구도와 부감법(俯瞰法 그림의 시점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으로 새가 높이 날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하여 조감법鳥瞰法이라고도 한다)에 의해 궁궐 속 건물들과 자연, 다양한 시설물, 조경물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였고, 원근법을 사용해 거리 공간감을 정확하게 재현하였다. 건축물은 자를 이용한 계화, 즉 곧고 가는 필선으로 정확하게 묘사하였으며, 녹색과 적색을 사용하여 궁궐의 색감을 화려하고 품격 있게 표현하였다.

   현재 국보 제249호로 지정된 동궐도는 각각 동아대학교 박물관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규격, 구도와 배치, 화풍이 유사하여 같은 밑그림을 이용하여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대본은 16권 화첩 형태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앞표지에 ‘東闕圖人’이라는 표제가 쓰여 있다. 이에 본래 ‘天·地·人’ 3건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표지가 없는 동아대본은 天 혹은 地로의 추정이 가능하다.

 

Ⅱ. 동궐도의 제작 시기

   일반인에게 금지된 영역이었던 궁궐을 그린 동궐도는 세부묘사의 정밀함에 비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제작하였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전무하다. 다만 순조대(재위 1800~1834)인 1828년에서 1830년 어느 봄날 규장각 자비대령화원들에 의해 그려졌고, 대리청정을 하던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1809~1830)가 관여한 것으로 판단되는 정도이다.

   제작시기에 대한 추정은 동궐 내 건축물의 화재 시점, 화재 당한 건물의 중건 시기, 해당 건물의 그림 속 등장 유무 그리고 『궁궐지(宮闕志)』의 전각 재건 기록 등이다. 창덕궁 경복전은 영조비인 정순왕후의 대비전이었는데 1824년(순조 24)에 화재로 전소되어 1834년에 중건된다. 또한 창경궁 왕비의 처소인 통명전은 1790(정조 14)에 불타 1833년(순조 33)에 다시 세웠다. 자격루를 설치했던 건물인 금루각은 1824년에 화재로 없어진 이후 복구되지 않았다. 이상의 기록을 토대로 금루각과 경복전이 무너진 시기인 1824년 이후부터 통명전이 중건되기 이전인 1833년 사이에 동궐도가 제작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또한 1830년(순조 30) 8월의 화재로 창경궁이 환경전, 경춘전, 함허정, 영춘헌 등이 소실되었는데 동궐도에는 화재 이전의 모습 그대로 그려져 있다. 효명세자가 부모님을 위해 세운 연경당은 1827년(동국여지비고) 혹은 1828년 2월 이전(궁궐지)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동궐도에는 주합루 인근에 단청을 하지 않은 단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동궐도는 늦어도 1828년 1월에 세워진 연경당, 1830년 8월에 화재로 사라지게 된 창경궁의 여러 전각들이 그려져 있는 점에서 1828년 1월부터 1830년 8월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기(1827~1830)여서 동궐도 제작에 효명세자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림 2. 동궐도에 그려진 창덕궁 인정전>

 

Ⅲ. 동궐도를 들여보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수많은 전각, 궁궐을 둘러싼 자연, 다양한 시설물과 조경물 등을 아름답고 세밀하게 그린 그림이다. 처음 건립된 15세기부터 19새기까지를 그린 동궐도는 한 폭의 궁궐건축 박물관이다. 창덕궁과 창경궁 건립 당시의 건축물인 금천교(1411년)와 옥천교(1484년경)부터 동궐도 제작 당시의 건축물인 효명세자가 세운 연경당과 의두합까지 400여 년 동안의 건축 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림 3. 창덕궁 금천교>

 

   동궐도를 통해 조선의 주 건축만이 아니라 부수적인 시설물과 조경물, 생활기물 등을 확인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그림에는 잡상, 박석, 문, 담, 판장(판자로 만든 목재 가림판), 취병(식물을 이용하여 만든 병풍 형태의 생울타리), 개울, 연못, 다리, 나무, 동물 조각, 드므, 괴석, 장독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기물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측우기, 풍기대, 해시계 등의 과학기기들도 주로 동궁인 중희당 영역이나 관측소, 주요 전각 등에 설치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

   장대한 동궐도 속에 작게 묘사되어 마치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여러 시설물들을 종합적으로 조명하면서 궁궐 속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궁궐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안내서와 같은 동궐도와 그 안에 숨어 있는 작은 그림 등을 찾아 사라지고 훼손된 건축물의 복원은 물론 그 안에 숨 쉬는 조선인들의 감성을 이해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Ⅳ. 조선의 궁궐과 왕실의 일상

   궁궐이란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각 시대마다 궁궐이 지어졌지만 남아 있는 궁궐은 조선시대뿐이다. 조선은 1392년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이후 무수한 논의 끝에 한양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국토의 중앙 지역이어서 조운이 편리하고 주변 산세가 좋으며 터의 넓이가 적당했기 때문이다. 북쪽 백악산을 뒤로 법궁인 경복궁을 세우고 좌우에 종묘와 사직단을 배치함으로써 조선 궁궐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경희궁), 덕수궁을 가리켜 오궐이라 하며 이외에도 자수궁, 인경궁, 남별궁 등 임시거처로 머물던 성격의 궁궐까지 포함하면 20여 곳이나 된다. 경복궁은 조선 최초의 궁궐로서 1395년(태조 4) 창건되었다. 경복궁의 이궁으로 1405년(태종 5)에 세워진 창덕궁과 그 부속 궁궐인 창경궁(1484년 건립)은 가장 오랫동안 왕실의 사랑을 받은 곳으로 중요하다. 궁궐들은 도성의 북쪽에 위치하는 경복궁을 북궐이라 명칭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 서쪽의 경덕궁은 서궐이라 부르게 되었다.

   창덕궁은 태종부터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할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궁궐이다.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지만, 이후 가장 먼저 복구되어 경복궁이 중건되기 이전까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서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치르는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도성의 궁궐이 많이 훼손되는 가운데 비교적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조선 600여 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궁궐인 창덕궁은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독특한 공간 구성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 마련한 옛 수강궁터였다. 조선 궁궐 중 유일하게 정전이 동쪽을 향하는 궁궐이다.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 이웃한 창경궁은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은 물론 창덕궁의 좁은 공간을 해결해 주는 왕실 가족의 주된 생활공간이었다. 창경궁은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세자, 정조, 순조, 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창덕궁과 더불어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펴보는데 매우 중요하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창경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정원을 일본식으로 바꿨으며, 1911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켜버렸다. 1980년대부터 창경궁 복원 계획이 이루어지면서 창경궁으로 명칭을 환원하고 동물원 등의 시설을 철거하여 원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