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사범대학

QUICK MENU
  • 로그인
  • 사이트맵

세한도

세한도 歲寒圖

 

김정희(金正喜)

종이에 수묵

23.3 x 108.3cm

1844년

개인소장

국보 제180호

 

Ⅰ. 추사 김정희

<그림 1. 이한철 作 김정희 초상. 1857년>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6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추사(秋史), 완당(阮當)을 비롯해 승설도인(勝雪道人), 노과(老果), 천축고(天竺古先生) 등 100여 가지가 넘는다.

   김정희의 집안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더불어 조선후기 양반가를 대표하는 명문 가문이었다.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진 인물이다. 김한신이 39세에 후사 없이 죽자 월성위의 조카인 김이주가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 이가 김정희의 조부이다.

   김정희의 천재성은 어린 시절부터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번암 채제공이 집 앞을 지나가다가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立春帖)’ 글씨를 보게 되었다. 예사롭지 않은 글씨임을 알아차린 채제공은 이 아이가 반드시 명필로서 이름을 떨칠 것이라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정희는 어린 시절에 당시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제가 밑에서 수학하였는데, 스승이었던 박제가 역시 김정희의 ‘입춘첩’ 글씨를 보고 “이 아이가 크면 내가 직접 가르쳐 보고 싶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김정희는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가게 된 부친을 따라 사행길에 동행하게 된다. 부친을 따라 김정희가 북경으로 출발한 것은 1809년 10월 28일이다. 북경 체류 기간은 2달 남짓이었는데 이 사행길에서 2명의 중국인 유학자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5~1848)이었다. 김정희는 옹방강, 완원과 같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최고조에 이른 고증학의 진수를 공부하였다. 연경학계의 원로이자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였던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에 놀라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 찬탄했고, 완원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애정 어린 아호를 받았다.

   김정희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천문학에 대한 식견도 괄목할 만한 정도였다. 일식과 월식 현상 등 관측에 근거하여 서양천문학의 지식을 받아들였다. 1821년 34세의 김정희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출셋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10여 년간 김정희와 부친 김노경은 각각 요직을 섭렵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어지러운 정국과 정쟁의 파고 속에서 1830년 부친 김노경이 탄핵받는 일이 발생했다. 김노경은 강진현 고금도에 절도안치(絶島安置,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하는 형벌)되었다가 1년 뒤에야 겨우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들 부자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1838년 김노경이 세상을 떴고 김정희는 그 이듬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그러나 안동 김씨 세력들이 이번에는 김정희를 공격하여 그를 관직에서 끌어내렸다.

   김정희는 혹독한 고문 끝에 제주도에서 서남쪽으로 80리나 떨어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위리안치(圍離安置)는 유배형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으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다.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그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1849년 9년간의 유배를 끝으로 마침내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후 서울 용산 한강 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는데, 다시 모함을 받아 1851년 북청으로 유배 길에 올랐다. 다행히 귀양은 1년으로 끝났지만, 그는 이제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칠십 평생 열 개의 벼루 밑을 뚫고, 1천 자루의 붓을 망가뜨릴 정도의 예술혼을 지녔던 김정희는 말년을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며 일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Ⅱ. 세한도 들여다보기

   김정희가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그림이다. 1844년 그의 나이 59세에 역관이자 수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은 것은 유명하다.

   세한도의 구조는 간단하다. 창문 하나만 나 있는 허름한 집 한 채, 나무 네 그루, ‘세한도’란 그림 제목과 이상적에게 준다는 내용의 글씨 몇 자, 그리고 인장 몇 방. 이것이 전부다. 배경도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묘사력이 뛰어난 그림도 아니고 화려한 채색이 돼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림 2. 세한도>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준 표면적인 동기는 구하기 힘든 책을 청나라에서 구해다가 유배 중인 자신에게 보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책들을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바쳤다면 출셋길도 열렸을 것이고, 보다 나은 삶이 보장되었을 텐데, 굳이 바다 밖 먼 곳에서 유배 중인 자신에게 보내줬으니 그림이나 한 폭 그려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한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려 넣은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변치 않는 이상적의 의리를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문인화에서 소나무와 잣나무는 언제나 절개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세한도 속의 집은 기다란 집 한 채가 소나무 뒤로 배치되어 있으며 둥근 문이 하나 있다. 이것은 실제 집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상상 속의 집을 표현한 것이다. 소나무의 절개에 어울릴 만한 선비의 집을 표현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그것은 적막함과 쓸쓸함이 가득한 김정희의 의식세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세한도는 한겨울의 풍경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세한도는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상적의 곧은 절개에 감복한 김정희가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그림인 것이다.

 

Ⅲ. 세한도 글씨 부분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지난해에 두 가지 ‘晩學, 大雲’ 책을 부쳐왔고, 올해는 ‘藕耕文編’이라는 책을 부쳐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머나먼 천리 밖에서 구한 것이며, 여러 해를 거쳐 얻은 것이요, 일시에 가능한 일도 아니다.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더구나 세상의 도도한 물결은 오직 권세와 이익의 옳음만을 따르는데, 그것을 위하여 마음을 소비하고 힘을 소비함이 이와 같아, 권력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한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 것과 같구나.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사마천)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을 바라고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교분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는데, 그대 또한 세상의 물결 속의 한 사람으로 초연히 스스로 도도한 물결에서 몸을 빼어 권세와 이익의 밖에 있으니 나를 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써 하지 않는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잘못 된 것인가?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이후라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송백(소나무, 잣나무)은 사계절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추운 계절)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이 특히 세한의 후에 그것을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는 전이라고 더함이 없고, 후라고 덜함이 없구나.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거니와,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비<丕+邑>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아아! 전한(前漢)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